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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가키야마 이치야성

오다와라 성 안에서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하는 오다와라 호조 씨를 공격하기 위해 하코네 화산의 능선 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사적입니다.

석벽은 오다와라 성과는 달리 자연석과 구멍이 없는 안산암을 거칠게 쪼개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이도쿠루와, 미나미쿠루와의 석벽은 매우 훌륭합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오다와라의 시가지가 펼쳐지는 아시가라 평야부터 오이소 구릉, 그리고 그 경계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되는 고즈-마쓰다 단층의 지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치야 성에서 판의 경계를 보다

지구의 지표면은 수십 장의 판이라는 암판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 경계 중 하나가 이 부근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치야 성은 하코네 화산에 있으며, 하코네 화산은 필리핀 판에 속합니다.

오이소 구릉은 북아메리카 판에 속합니다.

이 두 곳 사이에(하코네 화산과 오이소 구릉) 판의 경계가 있으며 오이소 구릉 쪽이 융기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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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판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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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 전투 공방도

1590년 4월, 오다와라 호조 씨는 간토 지방의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전국 다이묘였습니다.
오다와라 호조의 본거지인 오다와라 성은 전국 통일을 추진하는 관백(천황을 보좌하여 정무를 총리하던 중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여러 다이묘의 대군에 포위됩니다

호조 VS 도요토미의 오다와라 전투
~천하를 판가름하는(판의 경계) 전투~

그리고 전국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이 전투 과정에서 간토의 장수뿐만 아니라 다테 마사무네 등 도호쿠의 여러 장수도 히데요시에게 굴복했습니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전국 시대는 오다와라 호조 씨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고했습니다.

히데요시,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 축성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공략하기 위해 장대한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을 건축하고, 충분한 병사와 자금을 준비하여 장기전에 대비했습니다.
이치야성을 건축한 후에 히데요시는 본진을 유모토소운지(하코네마치)에서 이치야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요도도노(히데요시의 첩)와 참전하는 각 장군들의 아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또한 센노리큐와 같은 다인과 예인들을 부르는 등 오랜 전쟁의 노고를 위로했습니다.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 전국의 영웅들

도요토미 쪽의 군세는 수륙을 합하여 약 22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선봉으로 세운 히데요시의 본대는 도카이도,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이끄는 홋코쿠 세력이 고즈케노쿠니(군마현)로부터 호조의 영토에 침공하였습니다
초소카베 모토치카 ∙ 구키 요시타카 등이 이끄는 수군이 병사와 물자를 운송하여 해상을 봉쇄했습니다
바깥 성곽의 총 길이에서 중세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오다와라 성 안에는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다와라 성에서 호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오다 노부카쓰, 가모 우지사토,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이케다 데루마사, 호리 히데마사 등 유명한 전국의 영웅들을 상대로 3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중세 최대 규모의 오다와라 성 출현

오다와라 호조 씨는 복종을 요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계속해서 교섭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오다와라 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강화하여 만반의 태세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오다와라 성 아랫 길을 둘러싼 전체 길이 9km에 이르는 장대한 성곽을 구축하여 결전에 대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히데요시와의 교섭은 결렬되었습니다
오다와라 호조 씨는 국경선을 단단히 정비하는 동시에 오다와라 성에 전력을 투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내 100 곳 이상에 이르는 지성의 방비를 굳건히 하여 방어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오다와라 호조 씨의 항복

오다와라 호조 씨는 각지의 여러 성을 방어하면서 기회를 틈타 반격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다와라 호조 씨의 주력이 지키던 오다와라 성은 봉쇄당한 채 각지의 성이 무너지면서 점차 고립되어 갔습니다.
같은 해 7월에 이르러 호조 우지나오는 성을 나와 항복했습니다.
호조 우지나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대신에 성에 있던 일족과 가신, 백성들의 구명을 청했습니다.
히데요시는 그 행동에 감탄했습니다.
그는 우지나오를 죽이지 않고 고야산으로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우지나오의 부친인 우지마사와 그 동생인 우지테루에게는 할복을 명했습니다.
이로써 전국 다이묘 오다와라 호조 씨는 멸망했습니다.